꽃이 진 자리에서 우리는
- 미선이, 효순이의 영혼을 달래고자 -
김석봉(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아찔해요, 엄마.
언제나 겁났어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
제비꽃, 강아지풀 흐드러진 길
마주치는 미국군인 우리 키 만한 총칼이
번쩍번쩍 빛날 때마다 겁났어
크르렁 크르렁 굉음을 울리며
반도의 길, 우리의 길 짓뭉개는
미국 탱크는 언제나 겁났어
그래, 아가
그래, 조심해야지
탱크가 오면 저만치 밭둑으로 피하고
총칼 멘 미국군인 지나가면
토란잎으로 눈가림도 해야지
조선 처녀 목 졸라 죽인 놈들
조선 처녀 가슴에 칼질한 놈이잖니
조선 땅 피범벅 만든 놈들
매향리, 아아 매향리
매화꽃 향기가 그리 좋다는 마을
죽음의 땅으로 만든 놈이잖니
우리는 오늘도
엄마 말씀처럼 조심했어
달맞이꽃 향기로운 꽃길을 따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친구 생일 축하노래 연습하면서
걸었어, 반도의 길, 대한민국의 길
경기도 양주군 56번 지방도로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을 조심조심 걸었어
그때였어, 우리가 찔레꽃 꽃가지 꺾어
서로 가슴에 매달아 줄 때
크르렁 크르렁 미국 탱크소리 들리더니
싸늘한 쇳덩이가 등뒤로 다가왔어
미선아, 효순아
왜 아직 돌아오지 않니
날이 저물고, 길은 어둡고
크르렁 크르렁 미국 탱크 구르는 소리 요란한데
샛별마저 기울어
엄마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마을 앞 당산나무 귀신울음에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애태우고 있는데
미선아, 효순아
왜 아직 돌아오지 않니
살려주셔요, 엄마
묵직한 쇳덩이가 신발을 벗기고
다리를 타올라, 마침내는 반도의 허리
잘록한 내 허리를 끊었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아
숨이 막혀, 눈앞이 깜깜해
크르렇 크르렁 미국 탱크소리 속으로
미국군인 낄낄거리는 웃음이 들려
몽롱한 의식, 붙잡을 것조차 없어
아련한 추억 새김질하며
엄마, 엄마
우리는 그렇게 죽었어
내 딸들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풋살구 같은 웃음 남기고, 산토끼처럼 깡충깡충
유월 풀향기 속으로 뛰어가던 모습
아직도 눈앞에서 춤추는데
죽었다니,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군 56번 지방도로 고향길에서
미국 놈 탱크에 깔려 죽다니
이럴 수는 없다, 대한민국 길에서
이럴 수는 없다, 전쟁터도 아닌데
미국 놈 탱크에 깔려 죽다니
찔레꽃 같은 내 딸들아
살아남은 우리는 너를
이처럼 허망하게 보낼 수 없다
엄마, 참 이상해
그래도 미국을 믿었어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떡하느냐며 믿으랬어, 선생님이
미국 땜에 북한이 꼼짝달싹 못한댔어, 텔레비가
경제발전, 나라안정이 다 미국 때문이랬어, 어른들이
그런데 나는 죽었어
미국 탱크가 나를 죽였어
내 예쁜 종아리, 내 꿈 많은 가슴
유난히 검어 친구마저 시샘하던 내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유린했어, 엄마
우리를 그렇게 죽였어
미선아, 효순아
이 땅에 피는 꽃은 우리 꽃이 아니란다
이 하늘을 나는 새도 우리 새가 아니란다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군 56번 지방도로
네가 눈감고도 다니던 길도
온전한 우리 길이 아니란다
너를 살해한 놈이 무죄판결을 받고
웃으면서 떠나는 나라
재판도 사과도 받지 못하는 나라
묵념하는 머리 위에 곤봉을 휘두르는 나라
밥상에 차린 밥도 우리 밥이 아니요
질곡의 역사, 죽음마저 쓸쓸한
이 땅의 하루하루가 다 우리 것이 아니란다
만났어요, 언니를
동두천 보산동 누게막 꽃거리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다 미군에게 칼맞아 죽은
언니들 피묻은 치맛자락을
그리고 또 만났어
삼팔선 철조망을 베고 누울 거라며
허위허위 통일의 길 달려가시던 백범할아버지
통일할아버지 문익환 목사님도 만났어
그분들은 꽃잎을 뿌리고 있었어
낯익은 길
우리가 쓰러져간 56번 지방도 위에
하염없이 꽃잎을 뿌리는 거였어
그래, 오냐
우리 미선이 효순이
꽃이 져야 씨앗을 맺듯
너의 죽음 헛되지 말라고 그러시는구나
물러서서는 안된다고 그러시는구나
이 땅의 자주가 잿가루처럼 흩어진 길
핏자국이 핏자국으로 그냥 굳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고
반미, 자주, 통일의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라고
그분들 넋이 다시 살아나
오늘 우리를 모이게 했구나
촛불을 밝히고
이렇듯 우리 함께 외치게 하는구나
엄마, 우리는 죽었어
사람이 죽으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지
우리는 꽃으로 태어나고싶어
꽃이라면 민들레꽃이 좋겠어
꽃이 진 자리에서 우리는
마침내 씨앗이 될 거야
남과 북 가시철망 맘껏 타고 넘어
봄날 온 누리에 꽃을 피울 거야
자주의 꽃, 통일의 꽃, 평화의 꽃
우리들의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 소원이야
잘 있어, 엄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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