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업현동조합노동조합

운영자에게  대화방  민중가요

번호 : 7135
글쓴날 : 2004-08-23 17:38:07
글쓴이 : 광전 조회 : 270
제목: 쌀과 민주주의

쌀과 민주주의

이 글이 책으로 나와 읽혀지는 9월 10일 경에는 우리나라 전역이 쌀로 인한
혼란에 빠져있을 것이다.
9월 10일은 멕시코 칸쿤에서 ‘누가 농민을 죽이는가? WTO 반대’를 외치며
죽어간 이경해님의 1주기가 되는 날이다.
2002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내가 우리쌀지키기 100인100일 걷기운동(이하 100일
걷기)에 참여하고 있을 때 전농에서는 ‘우리쌀 지키기 30만 농민 대항쟁’을
준비했다.
그 해 11월 13일 여의도에는 10만이 넘는 농민들이 참여해서 쌀 수입 개방
반대를 외쳤다.
집지킬 개만 남기고 여의도로 가는 차를 탄 마을이 여럿 됐었다.
지난 해 농민대회는 주요 구호가 한칠레 FTA 반대였다.
늘 11월에 해오던 농민대회가 올해는 9월에 하게된 이유는 겉으로 보기엔
이경해님의 1주기이지만, 나는 실제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9.10 대회는 각 시군 1만 농민대회를 전국에서 열어 100만이 모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이제 알게 된거다.
서울에서 여의도에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걸...

한달 쯤 전에 우리 마을 농민 회원 한 분이 면사무소에서 다투고 나와서는 술을
먹고 차로 면사무소 현관을 밀고 들어갔다.
공공건물파손죄로 구속됐다가 면 행정기관의 잘못도 인정돼서 정상 참작이 돼
일주일 정도 만에 나왔다.
며칠 전 전농 전남도연맹 의장님이 우리 마을에 와서 농민 회원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번 9.10 대회 때는 시군 정부청사를 점거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농민회 조직이 강한 전남 몇 개 시군에서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전농지도부는 전원 영등포구치소 구속을 준비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민주주의 사회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다’.
이게 부정되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이 가진 주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이다.
그런데, 그 대리인이 국민의 주권을 위탁받은 걸 이용하여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할 때 그 주권을 위탁한 국민은 무엇을 해야하나?
우리쌀은 우리의 주권 중 핵심인 식량주권이다.
이런 문제는 주권 행사를 위탁받은 국가라도 그 위탁업무를 할 때 지극히
신중해야 하고, 주권을 가진 국민의 건강, 안전, 미래, 생태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쌀 문제는 전 세계가 이미 세계화되어 정치적 주권이 가진 중요성이
과거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에서 사실 상 국가 주권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 중의 하나이다.
농민들이 국가를 공격하는 마음의 배경에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서 느끼는
주권 침해에 대한 자위 성격이 있다고  봐야한다.

천규석 선생님의 ‘쌀과 민주주의’는 그분 자신이 농민으로서 오랜 기간 농민
운동을 해온 농민운동가가 이야기하는 자기 고백이다.
내게 이 책이 더 고마운 것은 이 글이 쓰여진 동기가 ‘우리쌀 지키기’의 이론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100일 걷기는 나름대로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았지만, 그 이론 토대는 5장 안팎의
‘농업회생연대 선언문’ 정도였다.
이 정도를 가지고도 ‘우리쌀 지키기’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공감대를 만든
이유는 어린이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쌀 지키기의 이론이 없어도 공감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농이 주도하는 정당 방위 성격의 투쟁과 함께, 우리쌀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
특히, 국가 구성의 핵심인 민주주의의 침해라는 인식을 국민이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 탄핵 때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며 전국에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대통령이야 탄핵당하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 구제할 수도 있고, 그것도 안돼면
재선거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쌀 - 식량 주권이 무너져서 자치 민주주의의
기반이 무너져 식량 종속의 식민국가가 된다면 이건 정말 방법이 없다.
우리쌀을 지키는 건 식량 주권과 함께 자유와 행복의 기초인 자치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농민이 시군 정부청사를 공격하는 건 자치민주주의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자구 노력이고, 주권 침해의 위기에 놓인 개인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저항권이다.

녹색평론에서 내게 서평을 부탁한 책은 ‘쌀과 민주주의’와 함께 스코트
니어링님의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두권이다.
쌀과 민주주의는 그런 부탁이 없었어도 자세히 읽고 느낌을 정리하고
싶었었다.
니어링님의 책에 대해서 같이 쓰라고 한 이유는 천선생님과 니어링님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닮은 분이고 몇 년 전 천선생님께서 쓰신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와 니어링님의 책이 제목조차도 비슷해서 같이 이야기할
내용이라고 본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쌀과 민주주의’는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그때 그때 다시
보면서 민주주의 근본에 대한 이해를 위한 공부 자료로 삼을 만한 민주주의
학습교과서라면 (이 책은 우리쌀을 지키기위한 운동 지침서보다도 훨씬 더 깊고
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두세번 읽어도 그 내용을 아직 다 담아내지
못하겠다.), 니어링님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돌려주면 될 책이다. (왜
우리가 책마다 다 사야하나?)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나는 니어링님의 책을 부산에 갔을 때 시내 대형 서점 베스트 셀러 자리에서
찾았다. 잘 이해가 안됐다. 체게바라를 베스트 셀러 자리에서 본 것보다 더
어색했다.
어떻게 니어링같은 근본생태사회주의자의 이상이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나?

천선생님의 글은 상당히 직설 화법이고, 선이 뚜렷하다.
그런데, 밖으로 이렇게 드러나는 사람일수록 자세히 보면 그 내면이 따뜻하고,
작고 여린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진 분들이 많다.
‘쌀과 민주주의’는 천선생님이 가진 이 땅에서 가장 소외받고 무시되어온
‘자급 소농’에 대한 사랑의 연애편지와 같은 글이다.
이미 천선생님은 ‘땅사랑, 당신사랑‘에서 그런 연애 편지 양식을 보여 준
적이 있다.
어쩌면 100일 걷기에서 50일을 걸어 대구에 도착했을 때, 어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던 그런 손길로 쓰셨을 거다.
이 책의 3장 ‘우리쌀이 우리 문화다’는 농촌에서 더운 여름날 할아버지가
나무 그늘 아래 손주들 모아 놓고 옛날 이야기하듯이 전해주는 내용이다.
옛날 이야기하듯이 쌀 농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권력 관계가 만들어 졌는지, 지금과 같은 모내기 농사가 만들어 지기 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쌀을 수확하는 모내기
농법을 왜 싫어 했는지, 씨앗을 심는 농부의 발놀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풀매기 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부족한 물을 모아두는 노력이 오랫 동안 잘
안된 이유는 뭔지...
그렇게 모내기 쌀농사가 정착되는 동안에 단순히 쌀 수확이 늘은 것 뿐 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서로 협력해서 자치의 힘이 쌓이고, 새로운 계급이
생겨나고, 예술과 문화가 만들어져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천선생님께서 이 책의 1장과 2장을 2년 전에 써 놓고도, 3장을 쓰는데 2년이나
걸린 것도 쌀의 문화사를 쓰는 것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이야기처럼 되어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천선생님은 우리쌀이 가진 가장 소중한 가치를 만년 이상 이 땅에서 재배되면서
지금 이 땅 사람들 모습을 만들어 낸 쌀의 문화가치에 두신다.
이 쌀의 문화를 잃으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영혼’이 없어진다고 보시는
것이다.
쌀이 없어지면 ‘나- 자아’가 없어진다.
이미 우린 보리가 만들어 왔던 ‘나’를 잃었고, 갖가지 잡곡이 만들어 왔던
‘나’를 잃었다.
지금의 우리는 천선생님 세대가 공유하던 ‘나’ 가 아니다.
당신들 세대의 경상도 사람은 다 보리 문둥이였지만, 지금 경상도 젊은이
중에는 보리 문둥이가 아무도 없다. 
당신들의 세대와 지금 우리 세대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은 당신들께서는
그래도 오래 이어오던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이미 우린 ‘다른 나’로
상당히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쌀을 포기하면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곧 한국이라는 국가 조차도 불편해질거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권력을 잡아도 크게 거부감이 없어질거다.
왜냐면 쌀로 유지되던 ‘나의 영혼’이 없어졌기에 지킬게 아무것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1장은 제목부터가 안타까움이다.
‘우리쌀 어찌할 것인가?’
천선생님의 글은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에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상대가 누구든
설사 동지라고 하더라도 강하게 비판하는 성격이다.
1장 2부의 ‘쌀과 소농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그런 원칙에 바탕을 둔 강한
자기 비판의 글이다.
진보를 갈망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이 글을 깊이 읽는다면 자기 실천의 오류를
상당히 많이 줄일 수 있다.
우리쌀이 지금 겪는 위기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안을 찾기 위해
애쓰는지 모른다.
천선생님 자신부터 20년 세월을 도농공동체 운동을 해오셨다.
그 20년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 비판없는 운동이 얼마나 많은 오류에 빠지는
지를 보시고 쓰신 글이다.
이 비판에는 유기농 생산농민, 도시 생활협동조합,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
갖가지 유기농 농사법, 농협, 진보 농민 운동, 친환경농업육성법과
생활협동조합법, 선언적 도농공동체 등이 포함된다.
이 비판과 관련해서는 나도 들어가는 항목이 많다.
선생님 비판의 핵심은 우리가 운동이라고 말할 때는 사회에서 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소농’ 보호가 가장 중요한 기반인데, 위에서
말한 대부분의 운동이 물량화되고, 대규모가 되면서 운동 원칙을 놓치고 있는
것을 조목 조목 이야기하신다.
자기 기득권을 먼저 포기하고 실천하면서 하는 운동이 아니면 그 운동은 현재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그런 도농공동체는 말 뿐인 것이다.
실제 어떻게 해야하나?
선생님의 대안은 귀농하는 젊은이를 중심에 둘 것, 쌀을 생산할 토지를 도시
공동체가 확보해서 임대해 줄 것, 그리고, 젊은이가 생활이 가능하도록
책임지고 쌀을 같이 나눌 것이다.
당신께서는 오랫 동안 이 일을 준비해 오고 계셨다. 이런 게 실제다.

2장은 ‘우리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다.
우리 사회 대부분 운동은 오랫 동안 정부를 상대로 운동을 해왔다.
그 과정을 통해 수많은 개선과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 농민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도시 사람들도 그 속을
뜯어 보면 오십보 백보다. 답은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내용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 궁극적 책임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질 수 밖에 없는거다.
2장의 내용은 그런 책임의 주체인 우리가 그 책임을 놓아버리고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농촌이 어려워질 수록 비대해지는 농업 귀족, 교육과 의료의 모순,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모순을 보지 못하는 무지, 모순과 모순이 이어진다.
모든 모순이 들어가고 또 들어간 자리에서 만나는 게 있다.

‘세상에 공정 경쟁은 절대 없다. 사람마다 능력과 소질이 다르다. 능력과
소질이 다른 사람끼리 하는 불공정 경쟁으로 이긴 개인은 그 사회의 지배자가
된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요구하지만, 스스로 피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무도 없다.
그렇다면 경쟁 자체를 내가 먼저 하지 않아야 하고, 남도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130페이지)
‘경쟁은 시장의 논리이지, 공동체의 논리는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공동체는 따뜻한 체온이다.‘ (131페이지)

누가 쌀을 지켜야 하나?
나는 사람의 도리를 하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은가?
쌀을 포기하고도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나는 공동체에 시장 경쟁의 효율성을 끌어오지는 않았나?

이 질문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니어링님이 말씀하신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이 책 차례에 나온 작은 제목 몇가지를 보자.
‘내 삶이 가야할 길, 조화로운 삶을 가로막는 것들,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은
무엇인가?, 힘든 세상에서 조화롭게 살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니어링님이 던지는 이런 질문과 천선생님이 던지는 질문이 다른게 없다.
니어링님은 그의 생각이 정리된 첫 계기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실천하던 단일세 주의 운동가들이 만든 ‘아덴’ 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니어링님은 아덴공동체에서 열린 교욱을 이해했고, 혼자로든 사회로든 실천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힘을 얻게된다.
그가 이후 버몬트와 메인에서 살아간 조화로운 삶은 아덴을 시작으로 확대된
것이다.
수 많은 이상주의자들에게 공동체는 훌륭한 배움터이고, 그 꿈의 실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 다양성 속을 흐르는 강물같은 부드러움은 자발성과 나눔, 소박함과 열린
마음, 차이에 대한 존중, 어린이에게 배우는 낮은 마음 같은 게 있을거다.
이런 부드러움을 상실하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외형이 유지되더라도 이름만 남는 것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때 두레마을 공동체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니어링님이 아덴을 지극히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데, 내게 두레마을도 그랬다.
공동체를 한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내게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정말 꿈 속
같았다.
거기서 아내까지 만났으니...
그러나, 최근 두레마을 지도자이신 김진홍 목사께서 이라크 파병에 대해
지지하는 것을 보며, 강물같은 부드러움을 잃은 공동체는 전쟁을 지지할 수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분 나름대로 이유는 있으실 거다.)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홀로 살게 된다. 공동체는 아름다운 상처다.
니어링님은 오래동안 아내 헬렌과 외롭게 살았다.
버몬트에서 열 아홉해를 살았는데, 그는 주위로부터 끊임없는 적대감과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그를 미국 농촌 사회가
받아들이기엔 당시가 너무 험한 시대였다.
이 책은 그가 버몬트에서 19년을 살고 메인으로 옮긴지 얼마 안된 1954년에
썼다.
그가 메인으로 옮긴 이유는 이렇다.
‘기후도 알맞고, 사람들이 덜 따돌리는 편인데다가, 돈이 훨씬 덜 들고, 개척
전통과 개척자들의 끈기가 곳곳에 살아 있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어링 부부는 메인에서 그 동안 실천해오던 조화로운 삶 (자연과 함께하고,
날마다 정한 시간만큼 생계 노동을 하고, 전문 분야 활동을 이어가고, 시민들과
꾸준히 사귀고 나누고, 지성과 영성을 일깨우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다채롭게 펼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나눈 중요한 대화들이 이 책의
내용이다.
영어 원제인 ‘조화로운 삶을 찾는 이들에게 (man's search for the good
life)'에서 보듯 이 내용은 50년대 사회를 기준으로 당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쓴 에세이이다.
이런 정도의 얘기가 지금 귀기울여야 할 정도로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도 변치 않는 소중함은 니어링님께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읽으면 니어링님의 글은 오쇼 라즈니쉬나 틱낫한
스님이 쓴 글 이상으로 깊은 정신 세계로 이끌어 간다.
지리산생명평화결사에서 가장 소중한 기도는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이다. 이 기도의 실체가 니어링님이다. 
그의 평화는 세상을 위한 평화이지, 자신의 정신세계를 높이는 자기 만족이
아니었다.
니어링님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현실이
되도록 애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책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지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통해 이야기하는 지혜로운 권면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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