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업현동조합노동조합

운영자에게  대화방  민중가요

번호 : 5551
글쓴날 : 2004-04-28 15:10:50
글쓴이 : 강영희 조회 : 308
제목: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일고여덟살 무렵 골목길에서 뛰어놀다 돌아와 깜빡 빠져든 낮잠이 길어졌다.
깨어보니 달그락거리는 저녁 설거지 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사위를 둘러보니
해가 막 서산을 넘어간 뒤였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라며 환하게 웃으시는
엄마의 얼굴! 순간 나는 구석에 드리운 두꺼운 커튼 자락을 부여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돼? 삶의 찬란함에 운명적으로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을 처음 예감한 순간이었다. '삶 저편의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것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순간 대문 앞에 놓인 짚신과
사잣밥을 보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직감했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분명한
공포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핑계가 숭고한 삶 가리워
  
  얼마 전 어느 집안의 이장(移葬)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천성적으로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은 탓에 처음에는 '전설의 고향'이라도 보듯이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골(遺骨) 앞으로 바짝
다가서게 되었다. 사진이나 화면에서 가끔 보기는 했지만, 가까운 발치에서
맨눈으로 마주친 그것이 마음에 끼친 파장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의 시선은 어느새 '삶 저편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편의 삶'을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공포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흔다섯
속에 자리잡은 일곱 살의 나는 어느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삶에 대한
진지함으로 바꿔치기할 줄 아는 깜찍함을 집어들고 있었다. 
  
  어째서 그 순간 하필이면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을까.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 무릇 인생이란 핑계로 가득 차 있으며, 거기에는 별로 예외가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인생들은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전해오는 비법인 양 참으로
요긴하게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 하지만 어떤가. 대체 아무리 고결하고
숭고하고 빛나며 아름다운 명분이라 해도 거기에 일단 핑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만 하면, 그것은 마침내 적장의 목을 베는 보도(寶刀)에서 자신의
목을 베는 흉기(凶器)로 탈바꿈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명은 궁색해도 핑계는 낭자한 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김건모의 노래인 '핑계'의 콩나물 대가리가 나를 따라왔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가악을 해봐. 네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혼자 남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다고 농담처럼 진담인 듯 건네인 한
마디. 안개꽃 한 다발 속에 숨겨진 편지엔 안녕이란 두 글자만 깊게 새겨 있어.
이렇게 니가 날 쉽게 떠날 줄은 몰랐어어.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에 스을픈
사랑을 가르쳐준다고 넌 핑계를 대고 있어. 넌 핑계를 대고 있어어. 
  
  과연 이 세상은 핑계로 넘쳐난다. 핑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유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심지어 사랑 또는 인생 자체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핑계일는지도 모른다. 흔히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사랑한 것이 그 또는
그것이었는지, 아니면 핑계의 여우목도리 속에 숨어있는 나 자신이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리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유혹에 발목 잡히지 않기를
  
  그러고 보면 각별히 유쾌 상쾌 통쾌한 마음이 들 때도 바로 핑계 없는 인생과
마주칠 때이며, 신선이 돼서 물찬 제비처럼 '가비얍게' 땅을 차고 하늘에
오르는 것도 핑계와의 결별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생이 용이 아닌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어쩌면 핑계라는 놈에게 발목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핑계 없는 무덤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훗날 나는 참으로 핑계 없는 무덤이 되고 싶다. 달리 말하면 나는
정말로 핑계 없는 삶을 소망한다. 그건 금연이나 작심삼일 따위와는 구별되는,
그야말로 나의 전 인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이다. 이토록 화창한
봄날의 천지는 이만한 뚱딴지쯤이야 너그럽게 받아주실 것 같아서 문득 해본
소리다.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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