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문화일보> 2004년 4월 20일자에 게재된 명지대 정치학 교수의
칼럼이다.
여야간의 치열한 선거전이 막을 내렸다. 이번 17대 총선 결과, 가장 큰 이변은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 다수당이 됐다는 것과 보다 진보적인 민주노동당이
원내 제3당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 언론은 이를 두고 "진보
세력이 국회를 장악했다" "정치의 중심이 좌측으로 이동했다"는 등의 수사를
써가며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의 일부 보수층에서는 앞으로 정국의 향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일부 식자층의 우려는 기우이며 우리
정치는 지극히 정상적인 목표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
차제에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한번 되짚어 보자. 먼저, 보수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자는 것이고, 진보는 가능한 현상을
타파하여 우리의 이상적인 삶을 향해 현실을 개혁해 나가자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노약자·장애인·노동자·농민·서민 등 사회적 약자인 이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보다 더 배려하자는 것이 '진보'의 논리다.
그 같은 '혁신'을 외면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자"는 '보수' 일변도의
정치가 결국은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기는 역설적인 사례를 우리는 근세사를 통해
많이 보아 왔다.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왕정의 화신이었던 부르봉(Bourbon) 왕가의 '보수(保守)'
통치가 빚은 참극이었다. 루이 15세가 "내가 죽고 난 뒤에 홍수가 나든 말든
상관 없다(Apres moi, le deluge)"는 식으로 후대(後代)를 생각하지 않고
실정을 저질렀다.
그 후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사치와
일락(逸樂)을 일삼다가 결국 혁명을 맞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루이
15세가 말한 대로 홍수에 떠내려간 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의 발단이
된 식량폭동이 일어나자 "빵이 없으면 고기도 먹고 들에 나가 풀도 뜯어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는 유명한 얘기도 전해 온다.
1911년의 멕시코 농민혁명으로 100여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은 로마노프왕가의 보수 통치가 빚은 비극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도 절대왕정 아래의 위정자가 '가진 것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다가 모든 것을 잃은 또 다른 경우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혁명후 레닌의 공산주의 실험 70년 만에 국가가
파산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러시아 국민들은 선대 위정자의 실정으로 혁명이
일어나고 그 뒤에도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당 독재의 통치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정치 불안은 사회 계층 간의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국민이 고루 다 잘 살게 되지 못할 때, 즉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지 않을 때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고급 아파트에 사설 경호원을
배치하고 미국의 뉴욕 등 대도시에서는 일몰후 거리나 지하철에 사람의 통행이
뜸해지는 이유가 바로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인해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남미 일부 국가에서는 도시 빈민 게릴라의 출몰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하고, 심지어 브라질은 도시 빈민가 지역을 담으로 에워싸서 일반
주거지역과 차단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외신 보도까지 접하게 된다. 과연
우리나라는 이러한 외국의 사례를 '강건너 불'처럼 안이하게 생각할 수만
있을까.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 등 사회 문제가 아직 폭발단계에까지, 즉 비등점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나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우리 주위에 돈이 없어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고 병원비가 없어서
부모나 자식이 손쓸 겨를도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속절없이 바라봐야
하는 이웃이 수없이 많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모름지기 17대 국회에서는 획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때이며 국가 재정이
어려우면 ‘부유세’를 신설해서라도 경제 선진국의 참다운 면모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요컨대, 러시아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수(保守)'하기 위해서는 보다 '진보'적인 정강·정책과 정책 대안이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야말로 진정한 '보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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