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간조선> 2004년 4월 1일자, 1797호에 게재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의 칼럼이다.
국론 분열에 버금가는 논란 끝에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 이라크에 약 3000명
규모의 병력을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하였고, 올 2월 국회의 동의까지 마쳤다.
오는 4월 7일 한국군 선발대가 가고 4월 말 본대를 보내기로 하는 등
파병준비가 착착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우리 국방부는 지난 3월 19일 "한ㆍ미
양국은 최근 키르쿠크의 치안 상황이 나빠짐에 따라 한국군 파병지역의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파병지역을 새로이 물색하기로
함에 따라 파병 일정이 한 달 이상 연기될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이라크 내 테러가 급증하고 스페인 등의 철군 움직임을 고려할 때
정부가 평화적 재건임무만 맡겠다고 버텨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예 파병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파병을 하기로 해놓고
파병지의 치안상황이 악화되었다고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파병지를 바꾸고
일정을 지연시키는 것은 차라리 파병을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강변한다.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위해서는 다시금 한국의 이라크 파병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라크 파병은 2002년 말 '촛불시위' 이후 상호간
신뢰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온 한·미관계가 새롭게 재정비될 수 있는
기회다. 미국은 한국군이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이라크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동티모르 지역에 다국적군으로
파견됐던 상록수부대의 활동에서 증명되었듯 한국군의 평화유지 활동은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 이라크 파병을 계기로 한국은 미국과 함께 유라시아 '거대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을 포괄하는
유라시아 지역은 카스피해 연안을 중심으로 거대한 양이 매장되어 있는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과 이를 국제시장으로 운송하는 송유관 경로를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미국ㆍ러시아ㆍ터키ㆍ이란ㆍ파키스탄ㆍ인도 간의
각축전이 '거대 게임(great game)'의 양상을 띠고 있는 지역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중동 질서 재편 전략의 일환이며, 미국은 이라크의
재건을 통하여 바그다드를 중동의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라크 장악은 또한 카스피해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중동으로부터의 석유 수입에 과다하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에너지
안보'의 관점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켜야 할 입장이므로,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정책이 군사정책 위주가 아닌 보다 '포괄적' 차원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셋째,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은 이라크 국가 재건과정에 한국이
기여함으로써 이라크 국민들의 '인간 안보(human security)'를 개선시키기
위함이다. 이는 경제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적절한 수준의 삶의 질, 그리고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보장을 뜻한다. 이는 한·미동맹이 한반도에 국한된
군사안보적 성격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가치를 지향해 나간다는 점에서
한·미동맹의 향후 '비전'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론적으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에 대한 약속임과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한 신의가 걸려 있는 문제이다. 파병지를 변경하기로 한 이상 우리는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신속하게 대체 지역을 결정해야 하며, 평화재건 활동과
치안유지 활동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자세를 보여주어 미국 측으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
마드리드에서 대형 테러 사태가 발생한 이후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계획하고
있는 스페인은 미국과 동맹국들 간 균열을 노리는 테러 집단의 노림수에
굴복하는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의 '자이툰' 부대만은
테러리스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도록 철저히 무장하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이라크 평화재건 활동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고, 한미동맹이
21세기의 새로운 비전, 즉 '인간안보동맹'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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