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라는 기억의 이슬은 아직 마르지 않았지만, 4월이 잔인하다는 말은 이제
유효하지 않습니다. 4월 뿐 아니라 10월도 잔인합니다. 잔인해도 너무
잔인합니다.
10월 한 달 내, 세 명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두 명은
죽었고 한 명은 회복 불투명의 중태입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라는 유서를 쓰고 23일 세원테크
노조위원장은 분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또 한
노동자가 세원테크 노조위원장의 유서를 비웃듯 분신을 했습니다.
자살이 무슨 전염병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니, 갑자기가
아니지요. 대통령직도 못하겠다는 판국인데 노동자들이야 말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21일 대정부 질문에서 지금의 경제난은 강성노조와 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탓이라는 의원들의 강도 높은 성토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지난 번 철도
파업에 따른 철도청의 손실이 철도청이 말한 액수 그대로 받아들여도 100억원이
안됐습니다. 기업에서 받은 불법 정치자금이 누구는 100억, 누구는 200억이라고
떠드는 건 또 무슨 경제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정치원리인가요?
한진 김주익 지회장이 한 달에 10여만원의 급여를 받을 때, 한진 중공업은
대표이사에게 7억여원의 배당급을 지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진중공업
경영진은 파업손실을 명분으로 파업 참가자 전원에게 모든 재산을 가압류
하겠다고 '협박'을 했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 된 건 경영진 못지 않게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정부는 두산중공업 노동자가 분신 자살 했을 때, 가압류 남용방지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강경책'으로 돌변하면서 스스로 철도파업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했습니다. 노조에는 '법대로'를 외치면서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에는 눈감은 이중 잣대가 비극을 불렀고 또, 예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은 인심이 좋습니다. 대선자금을 자진 공개하고 사면을 받는
내용의 '특별법'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니요. 죄 지은 사람들이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만든다네요. 정치권에서는요. 등에서 식은 땀이 납니다.
분노한다고 해서 해결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4.19와 6.3, 부마항쟁과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의 빛나는 역사적 깃발에
자위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걸치고 있는 옷이 너무 남루합니다.
죽음의 그늘 아래 민주노조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적이 있고 적 안에도 우리가 있는 이 새로운 불연속성의 지형도.
위로부터의 강압이 폭력의 한 축이라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의도 폭력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은 아닐지...
모든 죽음은 부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의 분신은 극단으로 부정적인
기운의 결과입니다.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한국사회에서
기대한다는 건 좀 무리일 듯 싶습니다. 그러기에 민주노조를 살리고 죽음의
의미를 긍정으로 바꾸는 건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산이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지고 말이 끊어져도 뜻은 이어집니다.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서는
'절대로 스스로 죽지 않는 노동자'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 년
내내 잔인한 나라가 되는 게 싫어서 장작불로 산화한 고인들의 넋이 잿더미
속의 숯불처럼 다시 불덩이로 활활 타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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