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법당>
요약
북송(北宋)의 신종(神宗) 이후 북송 멸망 때까지 왕안석(王安石)·채경(蔡京)
등 신법당(新法黨)의 정책에반대하던 수구파(守舊派) 정당.
왕안석을 수령으로 한 신법당의 관리에는 남방의 낮은 지위의 출신자가 많았고
정책이 진보적이고 혁신적이었는데, 사마광(司馬光)을 수령으로 한 구법당의
관리는 주로 화북지방의 대지주나 대상인 출신자가 많았으며, 따라서 그 정책도
보수적이었다.
신종이 죽고 나이 어린 철종(哲宗)이 즉위한 초기에는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하면서 사마 광을 재상으로 하고 구법당으로 하여금
정국을 담당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신법당에서 실시해 오던 신정책을 모두
폐지하였다. 그러나 철종이 성장하여 신법당을 지지하자 그들은 정부에서
밀려나고 신법당이 정부를 맡게 되었다. 다음 황제인 휘종(徽宗) 초 한때
구법당과 신법당이 함께 정부를 담당하였으나 다시 구법당은 물리침을 받고
분열하여 세력을 잃었다.
그러나 남송 초 고종(高宗)이 구법당이 옹립한 철종의 폐후(廢后)
맹태후(孟太后)로부터 정통을 인정받은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등용되어
세력을 만회하였다.
<신법당>
요약
중국 북송(北宋) 신종(神宗)초기 혁신정치를 단행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을
지지한 당파.
본문
신종의 지원으로 부국강병의 신법을 통해 혁신정치를 단행한 왕안석과 그의
정책을계승한 채확(蔡確) ·여혜경(呂惠卿) ·장돈(章惇) ·채경(蔡京) 등
일파로, 이들은 조법(祖法)을 묵수(墨守)하려던 사마 광(司馬光) 계열의
구법당과 정책적으로 대결하였다. 신법당 관료는 화북 ·화남 출신으로 대개
미천한 계층들이 많아, 호상(豪商) ·대지주의 이익을 억제하고, 중소농민이나
상공업자의 이익을 도모하여 중산계층을 육성함으로써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국방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다.
신종 때에는 이 정책이 성공했으나,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구법당이 정권을 잡고 신법당을
몰아내어, 혁신정책은 거의 폐지되었다. 철종이 친정을 하게 되자, 신법당
관료들이 재기용되어, 휘종(徽宗) 초를 제외하고 북송 말까지 신법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료들은 구법당 관료들과 같이 거의
개혁 의지가 없었으며, 결국 북송은 1127년 금(金)나라에 멸망되었다.
몰라서 사전을 찾아봤는데
사전에서는 화합을 못해서가 아니라 신법당 관료들이 구법당 관료들과 같
이 거의 개혁의 의지가 없어서 결국 금나라에 멸망했다고 보고있네요.
다른데 가서도 알아봤는데 신법당의 개혁이 좀 미진했던 것 같아요.
여러가지 신법으로 중소상인과 중소농민의 구제를 할려고 시도는 했는데
오히려 중소상인들의 몰락을 가져와 이후 구법당이 재집권하는 주된 명분
이 되었답니다. 개혁 세력의 힘이 모자랐던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서로 합심할려면 10발이고 100발이고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물려주다보면 둘이 같아지는데 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
이 나지요. 합심은 하고싶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거지요.
역사를 개혁과 수구보수의 영원한 대결로 보고 그것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하면 아주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하는지 구체적인 사안을 가지고 평가하고 이야
기하는게 훨씬 생산적이겠지요.
>>> Writer : 심백강
> 그때 서로 합심했더라면
> 北宋의 개혁파 王安石과 보수파 司馬光
>
>
> 司馬光은 중국 北宋시대 사람인데 왕 안석은 變法 개혁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사마 광은 『資治通鑒』의 저자로 유명하다.
>
>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서로 정치적 견해를 크게 달리했다.
왕 안석은 당시를 변법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개혁의 시대로 본 반면 사마
광은 개혁을 결사코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에 섰다.
>
> 神宗의 신임을 등에 업은 왕 안석은 광범위한 개혁을 극히 단시일 내에
추진하여 불과 3·4년 동안에 국가의 수십 가지 주요법안을 개정 시행했는데
개혁이 이처럼 급속도로 진행되다보니 新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여론 수렴이나
토론의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없었다.
>
> 그가 만든 새로운 법령들은 대체로 여론수렴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제정과
동시에 시행에 들어갔으므로 내용상에서 또는 시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
> 더구나 왕 안석은 성격상으로 人和와 화합에 능숙하지 못한 집요한
성격으로 반대파와의 대립은 격화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신종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다지만 변법 개혁으로 인해 천하가 온통 소요가 일어난
상황에서 왕 안석의 개혁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
> 그러다가 1085년 3월 신종이 돌아가고 그의 아들 哲宗이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면서부터 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철종의 나이는 그때 열 살이 채 안되고
신종의 모친인 高氏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고씨는 몹시 보수적인 인물로 신종
생존시에도 왕 안석 신법의 좋지 않은 점을 말하며 신법의 폐지를 희망하곤
하였다.
>
> 그런데 그가 인사와 행정의 대권을 잡게되자 먼저 보수파 인물들을
기용하여 중앙정부의 각 요직에 두루 앉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마 광을
의지하고 중시하였다.
>
> 사마 광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왕 안석은 신법에 의한
개혁정책이 중도에서 중단될 위기를 맞을 것을 우려하여 때로는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였는데 왕 안석이 걱정한 대로 사마 광은 정부에 들어온 이후 신법을
폐지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
> 그는 "신법이 제거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하며 왕
안석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제도와 법령을 하나하나 폐기해 불과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신법을 거의 모조리 폐기해 버렸다.
>
> 변화와 개혁을 요하는 중요한 시기에 개혁파를 대표하는 왕 안석과 보수파를
대표하는 사마 광이 당시에 서로 건전한 정책연대를 통해 국익을
도모하였더라면 북송왕조는 새로운 중흥을 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 극단적인 충돌을 벌임으로써 정국을 파국으로 이끈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
> 오늘날 중앙회와 지역농협, 지역농협과 품목별 농협,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친북과 반북 등으로 갈라져 한치도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북송시대의 첨예하게 대립 충돌하던 왕 안석과 사마 광의 경우를
연상시킨다.
>
> 지금 우리가 처한 국내외적 상황은 당시 북송이 처한 국제적 여건보다 훨씬
심각하다. 따라서 이러한 분열과 대립 현상이 지속될 때 어떠한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
> 우리는 왕 안석과 사마 광의 경우를 거울로 삼아서 진보와 보수가 집단적
이기주의를 벗어나 농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건전한 개혁을 벌임으로써
농협를 더 이상 위란의 지경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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