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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2027
글쓴날 : 2003-06-18 15:41:17
글쓴이 : 심백강 조회 : 206
제목: 서로 합심

그때 서로 합심했더라면
北宋의 개혁파 王安石과 보수파 司馬光


司馬光은 중국 北宋시대 사람인데 왕 안석은 變法 개혁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사마 광은 『資治通鑒』의 저자로 유명하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서로 정치적 견해를 크게 달리했다. 왕
안석은 당시를 변법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개혁의 시대로 본 반면 사마 광은
개혁을 결사코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에 섰다.

   神宗의 신임을 등에 업은 왕 안석은 광범위한 개혁을 극히 단시일 내에
추진하여 불과 3·4년 동안에 국가의 수십 가지 주요법안을 개정 시행했는데
개혁이 이처럼 급속도로 진행되다보니 新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여론 수렴이나
토론의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없었다. 

  그가 만든 새로운 법령들은 대체로 여론수렴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제정과
동시에 시행에 들어갔으므로 내용상에서 또는 시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더구나 왕 안석은 성격상으로 人和와 화합에 능숙하지 못한 집요한 성격으로
반대파와의 대립은 격화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신종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다지만 변법 개혁으로 인해 천하가 온통 소요가 일어난 상황에서 왕
안석의 개혁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085년 3월 신종이 돌아가고 그의 아들 哲宗이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면서부터 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철종의 나이는 그때 열 살이 채 안되고
신종의 모친인 高氏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고씨는 몹시 보수적인 인물로 신종
생존시에도 왕 안석 신법의 좋지 않은 점을 말하며 신법의 폐지를 희망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인사와 행정의 대권을 잡게되자 먼저 보수파 인물들을 기용하여
중앙정부의 각 요직에 두루 앉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마 광을 의지하고
중시하였다.

  사마 광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왕 안석은 신법에 의한
개혁정책이 중도에서 중단될 위기를 맞을 것을 우려하여 때로는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였는데 왕 안석이 걱정한 대로 사마 광은 정부에 들어온 이후 신법을
폐지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신법이 제거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하며 왕 안석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제도와 법령을 하나하나 폐기해 불과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신법을 거의 모조리 폐기해 버렸다.

 변화와 개혁을 요하는 중요한 시기에 개혁파를 대표하는 왕 안석과 보수파를
대표하는 사마 광이 당시에 서로 건전한 정책연대를 통해 국익을
도모하였더라면 북송왕조는 새로운 중흥을 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 극단적인 충돌을 벌임으로써 정국을 파국으로 이끈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늘날 중앙회와 지역농협, 지역농협과 품목별 농협,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친북과 반북 등으로 갈라져 한치도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북송시대의 첨예하게 대립 충돌하던 왕 안석과 사마 광의 경우를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가 처한 국내외적 상황은 당시 북송이 처한 국제적 여건보다 훨씬
심각하다. 따라서 이러한 분열과 대립 현상이 지속될 때 어떠한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우리는 왕 안석과 사마 광의 경우를 거울로 삼아서 진보와 보수가 집단적
이기주의를 벗어나 농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건전한 개혁을 벌임으로써
농협를 더 이상 위란의 지경으로 몰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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