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민 학우 동생이 쓴 글입니다**
저희 오빠를 소개 합니다.
박제민 : 1997 경기대학교 동아리 연합회 회장
1998 경기대학교 총학생회장
1998 서울 총학생연합회 의장
수배생활 5년째
선천성 고도근시로 실명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원형탈모로 두피가
벗겨지고
얼마전 다리부상으로 다리에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함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기까지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 했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하자면 서울에 살면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한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 혹시 이런일 있지 않으세요?
항상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해서 너무 기쁜 나날들이 계속되는데 마음속이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불안한 생각을 들춰보면 하루종일 그불안감에
휩싸여 즐겁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는 그런기분.....
저는 요즘 화창한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혼자만 싸늘한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입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 셋 있습니다.
항상 즐겁고 낙천적이신 아버지와 꼼꼼하시고 친구 같으신 어머니... 그리고
우리집의
기둥이자 저의 마음에 겨울을 만든 우리 오빠..
어린시절 저는 항상 오빠에게 맞고 다녔습니다.
오빠는 항상 저를 쥐잡듯이 잡았고 그런 오빠는 저에거 정말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습니다.
오빠는 키가 무척이나 컸습니다.
유치원에 '재롱찬치'사진을 보면서 남들보다 머리가 한개 더 있는 안경을 쓰고
익살스럽게 웃는 오빠의 모습에 혼자 킥킥 웃곤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이 지났습니다.
오빠의 사진은 어떤 경찰서 에서나 볼 수 있는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와
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험학한 사진을 찍었는지...
남들이 보면 폭력전과자로 보였음직한 얼굴을 보고.....
우리 가족은 한동안 말을 잃었습니다.
오빠는 98년도에 경기대학에 들어가 동아리 염합회 회장, 경기대학 총학생회장,
서총련
의장직을 맡으면서
나라에서 말하는 A급의 수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체포와 동시에 특진에
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지금까지도 오빠를 마음껏볼수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경찰들의 끊임없는 미행과 멸절때만되면 목소리를 변조해 오빠가 다쳤다고
이야기를해
가족의 애를 태우고...
우리 가족은 항상 도총과 미행을 당하면서 5년을 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정말 우리나라에서 이런일이 일어날까 라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저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입니다.
저는 한총련이 아닙니다.
한총련에 대한 지식도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빠의 동생입니다. 오빠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올리고
오빠의
사면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 오빠는 선천성 고도 근시로 유치원때부터 골이 깊은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맨 앞자리에서 망원경을 쓰고 공부를 하였고 지금은 더이상
안경의
존재가 필요 없게 되어버려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을때는 안경을 벗어 버려야하는 그런정도의 악화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수배 생활로 시력은 점점저하되고 스트레스로 머리에 원형탈모가 생겨
머리가 훵
들여다 보입니다.
얼마전에 다리가 부러져 몰래 수술을 받고도 통원치료조차 제대로 받지못해
허리
디스크까지 생겼습니다.
저희 가족은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이제는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우리가족을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이제는 오빠를 볼수 있겠구나...
하지만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청와대에서 사면에 힘쓰겠다고 하고... 경찰측은 구속에 힘쓰겠다고 하니....
하지만 우리가족은 오빠가 5월이 넘지 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엄마는 오빠의 방을 새로이 도배를 하고, 새가구를 들여 놓았습니다.
시력이 나쁜 오빠를 위해 창을 하나 더 만들어 한층 밝은 분위기로
만들었씁니다.
저는 뭐 크게 도운 일은 없지만 18살때부터 24살때까지 오빠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색함을 없애려고
이제서야 오빠가 있는 한총련이란것에대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오빠와 대화를 할때 어색하지 않을테니까요.*^^*
이유야 어찌되었든...
오빠가 곧 돌아 온다고 하니 오랜만에 가족들은 활짝 웃고 살고 있습니다.
너무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희가족은 오빠와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마 생신이 5월 2일인데 그날은 꼭 같이 있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4월 30일에 사면소식에는 꼭 오빠 이름이 있을 거구요!
그리고 오빠가 나오면 5년동안 미뤄놨던 가족사진을 꼬옥 다시 찍겠습니다.
위의 글은 제가 오빠의 수배가 풀리길 기원하면서 쓴 글입니다.
오빠는 4월30일 점심에 두명의 친구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잠복
근무 중이던
경찰 10명에게 강제연행이 되어 갔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오빠의 안경이 연행중에 망가져 안경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구속영장을 보여 달라고 하는 오빠에게 오빠가 고도 근시여서 한치 앞도 분간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 경찰들은
구속영장을 슬쩍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오빠는 자세히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고 구속 되어가는 사람이 구속영장을
볼수
없는데 어떻게 구속을 해갈수 있나고 이야기 하자
경찰들은 "난 보여 줬으니 상관없다. 경찰서에 가서 못봤다고 하던 말던
상관없다"며
강제로 연행을 해 갔습니다.
회사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던 나는 정말 길바닥에서 주저 앉아 정신을 놓고
한참을
울었고 엄마는 한동안 계속 웃으시면서
'아닐꺼야! 말도 안되지~~ 이제 나올껀데...'
하시면서 혈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오빠는 장안동에 대공분실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오빠를 면회하고 나오던 중 실신을해서 응급실에서 긴급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제민이 돌아 온다고 제민이 방을 도배도 하고..... 가구도 들여놨는데...'
오빠가 만약 한달만 더 일찍 구속이 되었다면 저번에 석방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 왔겠지요.
5년동안 한쪽가슴의 심고 키워왔던 희망이라는 것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습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이제 한가지 길 뿐입니다.
5년동안 참아 왔던 모든것들을 터트릴 셈입니다.
그러다가 진이빠져 쓰러지더라고 죽을힘을 다해 오빠를 가족을 품으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서른이 넘으면 시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의사가 이야기 했습니다.
오빠의 눈에 빛이 남아 있을때까지 저는 오빠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저희 가족이 한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오빠의 일을 계기로 다른 수배자들의 사면이 되지를 기원합니다.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세상에 이런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것만
알아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참으로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그러기때문에 저희 가족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족 화이팅!!!
응원해 주시는 모든분들... 이글을 읽어부신 모든분들 화이팅!!
-4월30일 오빠가 강제 연행이 된날 장안동 대공분실 앞에서7시간동안
아스팔트에 앉아서
오빠의 이름을 불러주신
수배자 가족분들과 오빠의 사면이 되기를 함께 외쳐주신 학생 여러분들 너무
감사합니다. 특히 전경의 방패에 턱을
맞아 7바늘이나 꿰메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여학우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100여명의 오빠를 위해 온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해 오신 400여명의 전경들도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가.. 그리고 장안동 주민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
대공분실이라는게 장안동에 있어서 주택가였기 때문에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도, 내일도 나갈참입니다. 죄없는 사람들을 위해.. 또 오빠를
위해-
-오빠는 48시간 안에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4월30일
오빠의 연행소식을 듣고 회사에서 달려 나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전화해 보니 오빠가 우리 집에서 불과 5분도 안걸리는 장안동
대공분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에 도착하자 많은 전경들이 와 있었고 나는 오빠가 거기에 있구나를
짐작했습니다.
오빠를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그보다 몇배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장안동 길은
이때까지
볼수 없었던
광경을 자아냈습니다.
어머니가 정신을 잃으셔서 119를 불렀고.. 시간이 지나고 점점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여학생이 턱에 방패를 맞아 병원에서 7바늘이나 꿰메었고
우리가 빼앗은 방패를 달라고 그러면 오빠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서 계속 묵묵히 참고 있던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우리 오빠가 방패만도 못하냐!!'
'다친 여학생이 방패만도 못하냐!!'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사과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사과는 끝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두시부터 10시까지 백여명의 학생과 부모님들은 오빠를 위해 한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해산을 하면서도 우리가족의 손을 꼬옥 부여잡고 힘내라고 같이 뛰겠다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눈물속에서 하루가 흘렀습니다.
5월1일
아침에 대공분실로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빠가 단식을 하고 있다고 밥을 먹게 권유해 달라고 수사관이 이야기 합니다.
오빠를 믿기에 엄마와 전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285MM의 발에 250MM 의 슬리퍼를 신겨놓았더군요.
유치장에서는 양말을 못신는 규칙이 있다고 하면서.....
다리가 불편한 오빠는 그리도 꾹 참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정도의 나이의 수사관에게 예의없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형제라면 이해해 줄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사방이 높은담과 철문으로 둘러 싸여진 곳을 나오면서 한시라도 오빠가 빨리
나오기를
기원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경찰청에 항의방문을 가셨고 11시에 기자회견을 하십니다.
오늘은 노동절이라 연대에서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몇시간남지 않음이 더욱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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