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비극 4.3 유적지 순례기 (2009-04-06 20:49:10)
제주
4.3평화공원·목시물굴·잃어버린 마을 다랑쉬와 다랑쉬굴 등 제주 4.3민중항쟁 61주년 4.3 유적지 순례
제주
4.3항쟁 61주년을 맞아 민주노총 전국지역 조합원들이 제주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4.3유적지 순례에 나섰다. 순례 현장에
<노동과세계>가 함께 했다. 유적지 몇 곳을 돌면서 그동안 말로만 듣고 자료로만 접해 온 제주 4.3민중항쟁 역사를 생생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에서 제주민중들의 한 맺힌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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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평화공원 내에 건립된 4.3평화기념관. 4.3항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는 곳이다.
사진=노동과세계 | 제주항쟁 역사의 산실, 4.3평화공원 4.3
유적지 순례 첫 방문지는 제주 4.3평화공원. 이곳은 4.3항쟁이 오랜 기간 은폐되다 진상규명이 시작되면서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0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사과를 받아낸 후 최근 건립된 4.3기념관이다.
4.3평화공원 영상관에서 ‘제주 4.3의 기억’이란 제목
영상을 시청한 후 전시관을 돌아봤다. 주민들에게 천혜 피신처로 활용됐던 화산섬 제주도 중산간 지대에 산재한 천연동굴을 모티브로 한 전시관으로
향하는 긴 터널은 4.3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 첫 관문이기도 했다.
제2관 해방과 좌절, 3관 무장봉기와 분단거부, 4관 초토화와
학살, 5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에 이어 6관은 4.3 아픈 기억을 통해 평화와 인권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다랑쉬 특별전시관’에는 1948년 11명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 현장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했다. 긴박했던
피난생활과 당시 학살상황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수십 개 명비에 4.3항쟁 사망자 기록 최근 4.3평화공원
안에 항쟁당시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을 추모하는 위패봉안소와 위령탑이 세워졌다. 수십 개 거대한 명비에 3만여 명 사망자들 이름과 나이, 성별,
사망 혹은 행방불명된 날짜가 명기됐다.
명비들을 살펴보면서 당시 참혹했을 상황에 새삼 가슴이 저려왔다. 20세 젊은 아버지와 한
살짜리 아들이 함께 행방불명되고, 심지어 돌림자를 사용해 형제임이 분명한 가족 네 명 이름이 줄줄이 적힌 경우도 있었다. 부부와 두 아이가 한
날 한 시에 몰살한 집안도 수두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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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만여 명에 이르는 4.3 영령들 인적사항을 적은 묘비 수십개가 4.3평화공원 내에 건립됐다.
사진=노동과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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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를 살펴보면 돌림자를 사용해 가족임을 알 수 있는 이름들이 수두룩하다. 사진을 통해 양씨 집안 아들들이 몰살당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 백문관 29세 남 1948년
12월1일 사망 백문옥 26세 남 1950년 6월28일 행방불명 백문주 22세 남 1950년 6월28일 행방불명
송희창 41세 남 1950년 7월17일 사망 송희창의2녀 5세 여 1948년 12월16일 사망 송희창의3남 3세 남
1948년 12월16일 사망
김두칠 55세 남 1949년 1월25일 사망 김두칠의자 5세 여 1949년 1월25일 사망
이봉심 32세 여 1949년 3월 일자미상행방불명 이봉심의남편 36세 남 1949년 3월 일자미상행방불명 이봉심의자
7세 남 1949년 3월 일자미상행방불명
김현표 20세 남 1948년 8월 일자미상행방불명 김현표의자 1세 남 1948년
8월 일자미상행방불명
다음 행선지인 목시물굴을 향해 가는 길가에는 때맞춰 흐드러진 동백꽃과 유채꽃이 장관을 이뤘다.
벚꽃도 조금 응달진 곳은 봉오리가 졌지만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곳은 이미 만개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우거진 억새와 검은 빛깔의 현무암,
감귤나무들이 아름다운 제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버스에서 내려 200여m 쯤 걷다보니 울창한 숲이다. 제주도 내 산림이 우거진
곳을 ‘곶자왈’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마을 이름이 선흘리여서 ‘선흘곶자왈’로 불린다. 제주지역 최대 산림지역으로 이름나 일제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려는 지주들 다툼이 심했다고 한다. 지금도 골프장업자 등 노리는 사람이 많다. 몇 년 전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세트장이 생긴 이후
주변에 골프장이 하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4.3 당시 제주도민들은 토벌대가 오면 굴 속에 숨고, 토벌대가 가면 다시 마을로 가서
가슴 졸이며 살았다. 굴 속에 들어가면 3~7일 동안 숨어있었다. 그러다보니 이불과 양식 등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들을 옮겨다놓고 살았다.
마을 어귀에 달리기를 잘하는 날랜 ‘빗개소년’을 세워 꼭대기에 깃발을 단 긴 대나무를 쥐어주었다. 빗개소년은 해안 쪽을 지켜보고
있다가 경찰이 오면 검은색, 군인이 오면 노란색 천을 깃대에 매달아 마을 사람들에게 신호를 했다.
목시물굴에 숨어있던 한 청년이
밥을 지어먹으려고 물 길러 갔다가 토벌대에게 들켜 목시물굴 뿐 아니라 도틀굴 등 굴 몇 군데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한꺼번에 잡혀 학살당했다. 당시
18~35세 사이 남녀가 가장 위험했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보기만 하면 “너, 한라산
갔다왔지?”, “너, 폭도에게 쌀 줬지?”라고 다그치며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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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시물굴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칠흑같은 어둠 속에 꽤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숨어있던 도민들은 전원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사진=노동과세계 | 굴 밖으로 나온 사람들 전원 사살
당시 목시물굴에는 20여 명이 숨어 있었다. 토벌대가 총을 쏴대며 나오라고 했다. 굴 안 주민들은 나가야 할지, 더 깊은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사람들은 3시간 만에 나가기로 결정하고 한 사람씩 기어서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에
토벌대는 굴에서 나오는 주민들을 개머리판으로 찍어 제압한 후 인근으로 데리고 가 모두 총살해 버렸다. 여자들은 함덕 군부대로 끌고 가 겁탈한 후
죽였다. 이곳 작은 마을에서 250여 명, 북촌에서는 5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굴 속에 숨어 있다가 출산한 경우도 있었는데
간난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주민들 모두 발각될까봐 아버지가 데리고 가 자기 아이를 죽인 후 통곡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번
순례일정에서 목시물굴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노동과세계> 기자는 제주 4.3항쟁 60주년이었던 지난해 이맘때 목시물굴 속에
들어갔었다. 랜턴을 들고 처음 입구에 들어서서 앉은뱅이걸음으로 조심조심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위아래 높이가 30cm 정도밖에 안되는 공간이다.
천정과 바닥이 뾰족뾰족한 돌로 된 이곳을 통과하려면 별 수 없이 몸을 완전히 눕혀 엎드려야 가능하다. 어느새 어둠이 짙어지면서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들어만 봤던 ‘칠흑 같은’ 어둠이란 말을 체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각자 손에 든 랜턴을 끄면
눈을 뜨나 감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우리는 이 캄캄한 공간에서 4.3 영령들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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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시물굴 주변에는 4.3 당시 도민들이 돌을 쌓아 만들어 숨어 살았던 아지트가 20여 개 남아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 목시물굴 주변에는 4.3 당시 주민들이 사용하던 ‘아지트’가
20여 개 남아있다. 동백나무가 사람 키 몇 곱절 높이로 치솟아 음침하게 그늘진 땅에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공간들이다. 지름이 2~3m
정도인데 가족 단위로 생활했다고 한다.
다음에는 다랑쉬오름으로 향했다. 목장에서는 말과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 목련꽃이
활짝 핀 가운데 농사 준비에 한창인 농부들 모습이 다랑쉬오름으로 향하는 길목에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봄 햇살을 머금은 유채꽃과 벚꽃이 찬란한
빛깔을 뽐낸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그리고 다랑쉬굴 다랑쉬오름, 다랑쉬마을, 다랑쉬굴. 이곳 다랑쉬는
4.3항쟁 당시 모두 불타고 지금은 빈터로 남아 있다. ‘다랑쉬’라는 이름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고 해서 다랑쉬라고 했다는 설이 정겹다.
다랑쉬마을에는 애초 10여
가호 40여 명 주민이 살았는데 이들은 일찍 세화리로 소개했기 때문에 4.3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었다. 오히려 해변마을인 종달리, 하도리
주민들이 빈 들판인 이곳에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어간 것이다.
1948년 12월18일 성산 주둔 9연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다가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이 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굴 속에 수류탄을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순순히 응할 수 없었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었고, 굴속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해 하나 둘 죽어갔다.
이틀 전 아들과 함께 다랑쉬굴에 은신해 있었던 채정옥 씨(종달리)는
“저는 다른 곳에 있다가 사건 발생 다음날 굴속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고,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고 전하고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고통스럽게 전했다.
채정옥 씨는 44년 동안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앓이하며 살아오다 1992년 진상규명작업에 나선
4.3연구소 인터뷰 과정에 입을 열었다. 채정옥 씨의 “다랑쉬오름 옆에 가면 굴 속에 시신 11구가 누워있을 것”이라는 증언을 바탕으로
다랑쉬굴을 찾아냈다.
굴 속에는 채정옥 씨 말 대로 11구 시신유골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도 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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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랑쉬굴 입구. 1992년 발굴 즉시 당국은 이곳이 4.3제주항쟁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큰 돌로 입구를
막아버렸다. 사진=노동과세계 | 4.3연구소는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해 즉시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전문학자와 언론인, 의사, 법률가 등 현장조사와 자문을 얻어 그해 4월1일 공개했다. 유해 공개는 4.3당시 참혹하게
학살된 희생자들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고,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희생자 신원이 밝혀지면서 충격은 더했다.
비무장 민간인과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무분별한 토벌대 만행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독재정권은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공개 후 안기부에 의해 45일 만에 한 줌 재로 바다에 뿌려졌다. 유해 발굴의 파장을 차단하려는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해 화장하도록 종용한 결과였다.
“어떤 사람은 손톱이 다 닳도록 땅을 파다 죽어있었다” 채정옥 씨
생생한 증언은 4.3 당시 얼마나 참혹하고 비극적인 살상이 자행됐는가를 심감케 한다. “1948년 12월18일 군인과 경찰, 민보단이 합동으로
한 토벌을 피해 숨어 있다가 저녁에 와서 보니 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죽어있었습니다. 좁은 통로로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 불을 놓아
질식사 시킨 겁니다. 굴 속에 들어가서 보니까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 괴로워서 어떤 사람은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자도 서너 명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다랑쉬굴은 현재 커다란 돌로 입구가 막혀 있다. 발굴 당시 당국은 이
곳이 4.3항쟁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급히 굴 입구를 봉쇄해 버린 것이다. 4.3연구소 등 4.3항쟁 진상규명사업을 진행해 온 이들은 조만간
목시물굴과 다랑쉬굴을 비롯한 주요 4.3유적지들을 복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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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랑쉬굴 주변에는 제주도민들이 뱀을 쫓기 위해 많이 심는다는 대나무가 우거졌다. 그리고 영령들 넋을 담은 듯한
배추꽃이 유난히 많이 피어 있었다. 사진=노동과세계 | 제주 전 지역이 산
역사의 현장 4.3 유적지는 이밖에도 정뜨르 비행장, 동광리 무등이왓, 큰넓궤, 백조일손지묘, 섯알오름, 이덕구 산전, 의귀리
현의합장묘, 북촌리 옴팡밭, 관덕정, 낙선동(알선흘) 성터, 물장오리(4.3 유격대 훈련장), 영남동(하늘 아래 첫 마을-폐촌된 마을) 등
수없이 많다.
굳이 유적지를 찾아가지 않아도 제주도 섬 곳곳마다에서, 돌 하나, 흙 한 줌에서도 제주도민들 함성과 피맺힌 통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제주도 전 지역이 4.3항쟁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홍미리기자/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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