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부양수단으로 악용

노후 보장은 고사하고 ‘용돈’ 전락, 알아서 살아

이재훈 민주노총 정책부장

지난 8월 초 ICTU-AP에서 주최한 사회보장/조세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참가자가 “어떻게 연금급여를 20%씩이나 삭감하는 게 가능했냐?”며 놀란 듯 물었다. 난감했다. 도대체 노조는 무얼 했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급여인하저지를 중심으로 진행된 연금투쟁은 완패했다. 펀드열풍이 불고, 노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데, 공적연금은 여전히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서 자본과 정권은 차근차근 그들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가고 있다. ‘다층체계로의 구조개편’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서, 이제 오랫동안 눈독들여오던 먹잇감을 겨냥하고 있다. 바로 ‘국민연금기금’이다.

정부의 기금운용개편안의 핵심 1 : 가입자의 ‘연금주권’ 박탈

지난 7월 29일 또 하나의 국민연금법 개악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연금기금체계를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개편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먼저,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운용위)에서 가입자를 배제시키고, 민간투자자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기금운용위는 기금운용계획과 기금운용지침을 결정하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데, 전체 20인 가운데 12인이 가입자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외형적으로 보면 가입자가 과반이상을 이루고 있어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실제 가입자를 대표하고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체는 손에 꼽는다.

그런데 개편안은 위원회 구성을 7명(위원장, 민간위원 5인, 공사 사장)으로 줄이면서 가입자대표를 아예 배제하고 있다. 대신 가입자단체들은 11명으로 구성되는 위원 추천위원회에 단지 3명이 형식적으로 배정될 뿐이다. 가입자단체들은 위원회 자리도 빼앗기고, 추천위원회에서도 소수에 불과한 관전자로 밀려날 판이다.

<표 1> 현행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구성 (20인)

소속	단체
정부 (6인)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노동부, 농림부, 국민연금관리공단
국책연구기관 (2인)	한국개발원, 보건사회연구원
지역가입자 (6인)	수산업중앙회, 농협중앙회, 음식업중앙회, 소비자단체협의회, 참여연대, 공인회계사회
직장가입자 (6인)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국금융노련, 전경련, 경총, 중기협

정부의 기금운용개편안의 핵심 2 : 정부로부터의 독립은 시장으로의 종속?

기금운용개편안의 두 번째 핵심은 기금운용위를 정부로부터 독립, 상설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상설적인 운영은 오랫동안 가입자단체의 요구이기도 했다. 과거에 정부가 시중보다 낮은 이자로 연기금을 마음대로 이용해왔고, 이를 통제해야 할 기금운용위는 구성 뿐 아니라, 운영에 있어서도 정부 필요에 의해 거의 분기별 형식적으로 열리는 식물위원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심도깊은 논의와 검토를 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런데 개정안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금융자본에 종속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단순행정업무를 지원하는 사무국 하나 설치하고서 ‘상설화’한 것이라고 한다.

 개편안은 정부와 금융자본의 금융시장 부양을 위한 합작품

국민연금기금은 올해 말이면 무려 250조(GDP대비 25%) 규모로 국가재정과 맞먹는 수준이고, 2045년이면 GDP 80%수준까지 도달한다. 국민들이 매달 부어 온 돈이 조금씩 쌓여 국민경제를 뒤흔들어놓을 정도의 덩치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부와 금융자본은 연기금 운용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혈안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에서 이명박 정부의 “금융의 글로벌 스탠드화”까지 이어지는 ‘금융화’ 전략에서 연기금은 금융 중개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점차 주연급 지위를 차지해가고 있다.

이는 OECD가 ‘금융에 대한 탈규제’를 우선적인 조치사항으로 꼽으면서 보험과 연금펀드산업이 핵심 산업으로 지목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금융화’를 달성하기 위한 포괄적 경로에서 예정된 수순일 뿐이다.

이런 위험한 도박은 다양한 규제완화 조치와 함께 국민연금기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고, 다시 이를 통해 강화될 것이다. 세계은행이 칭송한 캐나다연기금운용회사(CPPIB)처럼 금융전문가를 중심으로 편성, 운영되는 모델은 정부나 금융자본 모두에게 이상적인 형태이며, 전진기지로서의 사명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위험투자의 확대에서 소유지배까지

올해 초 재경부는 증시안정을 위해 연기금을 주식시장에 조기 집행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연기금 관계자들과 대책회의를 진행했다. 연기금을 금융시장 부양을 위한 든든한 구원투수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실제로도 그동안 한국 증시가 하향곡선을 그릴 때마다 증시를 끌어올리기 위해 연기금이 집중 투입되었다.

이에 호응하며, 새로 선임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17.5% 수준인 주식투자 비중을 40%까지 확대하고, 80% 수준인 (비교적 안정적인) 국내외 채권투자비중은 50%까지 축소해 기존보다 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공격적 투자를 감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는 그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것인데, 정부 개정안마저 국회를 통과하면 그나마 가입자가 연기금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무력화된다. 오직 금융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금융전문가만 존재할 뿐이다.

이는 불안정한 금융시장에서 소중한 노후자금을 더욱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수익위주의 연금자산운용이 주주가치극대화경영만을 강요하여 고용확대기피, 임금비용 삭감, 그리고 비정규확대 등 노동유연화를 꾀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가 노후를 위해 낸 보험료가 결국 노동자의 목을 조이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셈이다.

하반기 법안이 상정되면,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추진됐기 때문에 큰 이견 없이 통과될 것이다. 노동자와 촛불이 이런 흐름에 균열을 가하는 강력한 투쟁을 만들 수 없다면 말이다. 연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노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진행되는 바로 지금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