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 국제회계기준 도입으로 국내 협동조합 조직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위는 서울시 중구 충정로1가에 있는 농협중앙회 본사.

농협, 수협, 신협 같은 국내 협동조합 은행이 특별한 경영상의 오류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단지 회계처리 기준이 변해 하루아침에 문을 닫거나 ‘부실 기업’으로 규정당할 위기에 놓였다. 지난 3월15일 금융감독원이 2011년 전면 도입을 목표로 로드맵을 발표한 ‘국제회계기준(IFRS)’에는 협동조합 은행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조항이 있다.

이미 미국·EU·일본을 비롯한 100여 개국이 채택·수용한 국제회계기준은 연결재무제표를 기반으로 해 투자자들이 기업의 경영 상태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만든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재무·회계 분야에서 가장 큰 변화다” “단순한 회계 기준의 변경을 넘어 기업의 가치 자체를 바꾼다”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우리나라는 그간 이 국제회계기준과 회계처리 기준이 달랐다. 그 때문에 정부는 ‘외국 투자자 등이 한국 기업의 회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라고 보고 금감원·금감위를 중심으로 꾸준히 도입을 추진해왔다.

‘자본’이 ‘부채’로, 주요 재무지표 ‘급락’

문제가 된 부분은 협동조합의 ‘자본’에 대한 개념을 규정한 조항이다. 국제회계기준에는 “법률, 규정, 정관에 의해 조합이 조합원 지분(출자금)의 상환을 거절할 수 있는 무조건적 권리를 보유하고 있으면 출자금은 자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반대로 만일 상환 의무가 있으면 자본이 아니라 ‘부채’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협동조합법 등 국내의 그 어떤 법·규정에도 환급을 거부할 권리나 금지 조항이 들어 있지 않다.

즉 국제회계기준을 그대로 따랐을 때, 현재 자본으로 분류되어 있는 농협 조합원 240여만명의 출자금 3조8341억원(2006년말 기준)과 수협의 출자금(공적자금) 1조1581억원은 일순간에 ‘부채’로 회계처리가 된다. 이 경우 농협은 은행의 재무건전성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인 BIS자기자본비율(자기자본/위험가중자산)이 현재의 12.34%에서 8.15%로 최소 기준 8%를 겨우 넘는 수준이 된다. 농협중앙회 오남섭 회계제도팀장은 “재무지표의 하락으로 경영상 여러 안 좋은 영향이 생기게 될 것이다”라고 우려한다.

수협은 상황이 좀더 복잡하며, 훨씬 치명적일 수 있다. 현재의 출자금과 자기자본 전액은 지난 2001년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이다. 당연히 정부에 상환할 의무가 있는 돈이다. 때문에 국제회계기준이 적용될 경우 사실상 회사의 존립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수협 측은 예금보험공사에 공적자금을 상환 의무가 없는 ‘재정자금’으로 전환해달라고 요청해봤지만 “국민 세금인데 말도 안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협동조합의 재무지표가 악화되면 조합원들의 연쇄 탈퇴와 출자금 인출이 잇따르고 다른 금융기관·기업과의 거래가 불가능해질 수 있으며 차입 이자율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심각한 경영난과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농협과 수협 측은 뒤늦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지만 딱히 뾰족한 대안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쉽게 생각하면 국제회계기준이 정한 대로 법과 정관 등에 환급 금지 조항이나 거부권을 명시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라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랜 시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농협 오남섭 팀장의 말처럼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현재 농협과 수협은 제도 보완 또는 경영 정상화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며 협동조합 은행에 한해 도입을 ‘유예’하거나 ‘예외’로 두는 방안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금감원·금감위의 입장은 단호하다. 금감원 최진영 회계제도실장은 “예외는 없으며 2011년 전면 도입이 원칙이다”라고 못박았다. 금감위의 한 관계자도 “국내 사정 때문에 일부라도 예외를 두면 국제회계기준을 도입하는 의미가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농협과 수협 측은 또 협동조합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국제회계기준의 일괄적 적용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수협중앙회 송재영 IFRS 준비단장은 “농협과 수협은 농민, 어민 등 경제적 약자를 지원하는 공익 역할을 하는 곳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일반 금융기관과 다름없이 운영해오다가 이제 와서 특수성을 강조하느냐”며 마뜩잖아하는 표정이다.

	ⓒ연합뉴스 지난 3월15일 ‘국제회계기준 도입 로드맵 발표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윤증현 전 금감위원장.

갑자기 ‘폭탄’ 맞은 협동조합들

그렇다면 왜 상황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존립까지 흔들릴 수 있는 사안인데 담당자들은 그간 대체 뭘 했던 것일까. 이 대목에선 정부나 협동조합 측 모두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협동조합 조합원 출자금의 자본/부채 분류 문제는 이미 1995년부터 국제회계기준이사회(IASB)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돼온 사안이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 수십여 개 협동조합 조직이 직접 의견을 제출해 출자금이 부채로 분류됐을 때 문제점을 지적했고, 일부 조항을 수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부 당국, 협동조합 그 어느 쪽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 측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한다. 금감위 관계자는 “세세하게 챙기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회계기준을 인정받기 위해 도입하는 것인데 일부 특수한 문제를 꺼내긴 어려웠다”라고 토로했다. 60여 개 항목에 달하는 국제회계기준 전체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길 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협동조합 측은 “논의는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해당하는 문제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며 한마디로 ‘폭탄’ 맞았다는 분위기다. 수협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애초 정부의 입장은 상장회사에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형평성 때문에 금융기관 전체에 적용하겠다고 나섰다”며 정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서울여대 구정옥 부교수(경영학)는 “회계기준의 재·개정 시 협동조합에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의견을 수렴해 협동조합 측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조직과 채널이 없다”며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우리나라엔 협동조합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 없으며, 국내 협동조합 조직들은 이번 국제회계기준 도입과 관련해 실무를 담당한 한국회계기준원의 회원 단체도 아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정부의 세심하지 못한 행정과 무책임, 협동조합 측의 안일함이 빚어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년 반 정도. 정부나 협동조합 측이나 이제는 더 이상 나몰라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과연 어떤 특단의 조처들이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