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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0-01 09:26
“운동의 철학 없으면, 우리는 싸움꾼일 뿐”
 글쓴이 : 경남본부
조회 : 1,145  
   http://www.labortoday.co.kr/News/view.asp?arId=43168 [269]
   http://www.labortoday.co.kr/News/view.asp?arId=43168 [252]

“운동의 철학 없으면, 우리는 싸움꾼일 뿐” 
 
‘참교육’부터 ‘사회공공성 강화’까지…노동운동이 던지는 사회적 의제에 주목하자
 
‘참교육’ ‘돈보다 생명을’ ‘사회공공성 강화’ ‘철도를 국민에게’…. 이 단어들과 연관되는 노조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전교조, 보건의료노조, 공공연맹, 철도노조. 적어도 ‘노동’이나 ‘노조 ’ ‘노사관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올 것이다.

지나가는 학부모에게 “사교육 때문에 힘들지 않느냐”라고 물어보자. 병원을 찾아온 환자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진료비, 입원비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대부분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스스로 제기해 온 사회적 요구들은 일반 서민들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노동조합의 요구가 곧 서민들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들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조금씩 그 이름의 차이는 있지만, 각 노동조합들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정체성’이 ‘브랜드’로

지난 1989년 군사독재 정권의 반공주의, 억압적인 권위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고 참다운 인간성을 되살려야 한다는 다짐 속에서 ‘참교육’을 외친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조를 출범시켰다. 당시 우리나라 교육과 교사들이 나아가야 했던 길을 한마디로 표현했던 ‘참교육’이라는 구호는 ‘전교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이 됐고 브랜드가 됐다.

송원재 전교조 대변인은 “당시에는 특별한 이념으로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지향하는 교육의 상을 쉽고 간명하게 얘기한 것이었다”며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화해를 지향하는 교육 본연의 의미를 나타냈다”고 회고했다.

올해 6월 최초로 산별총파업을 벌였던 보건의료노조는 출범 초기부터 제기해왔던 ‘의료개혁’의 요구를 ‘돈보다 생명을’이라는 기치로 만들어 전면에 내걸었다. “병원사업장은 돈벌이 대상이 아니고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지난해부터 이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각 병원마다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자들이 이 포스터를 가리키면서 ‘돈보다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왜 이리 진료비가 비싸냐’고 병원 쪽에 항의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은 “자연스럽게 나온 우리의 지향점이었고 정체성이고 이정표”라고 말했다.

전교조와 보건의료노조가 내세운 구호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태동하고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공공사업장이라는 특성상 다른 사업장이나 산별연맹보다 선명하게 사회에 각인돼 왔다. 하지만 이들 노조뿐 아니라 다른 산별연맹과 산별노조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각자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구호들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결부된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해 왔다.

운수, 에너지, 복지, 환경 등 다양한 업종으로 구성된 공공연맹은 2002년부터 ‘사회공공성 강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국민철도, 발전매각저지, 지하철 시민안전, 예술의 공공성 등 각 업종의 구호를 포괄하면서도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시장주의가 강화되는 추세에 맞서 공익적 가치를 지키자는 핵심 주장을 이 말 한마디에 담았다.

뒤늦게 출발한 공무원노조는 ‘공직사회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을 내걸고 있다. 최근 추석을 맞아 직접 부정부패 감시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일환이다.

비단 공공분야뿐 아니라 금속산업의 ‘산업공동화 문제 해결’, 건설산업의 ‘현장 비리부패 척결’, 금융산업의 ‘해외투기자본 저지와 금융공공성 강화’ 등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문제를 벗어나 국민들에게 던지는 사회적 의제는 웬만한 산별연맹과 노조로 확대됐다.

나상윤 공공연맹 정책기획실장은 “노조의 성향에 관계 없이, 심지어는 보수적인 노조들까지 공공성을 내걸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한다.

정치에서 경제로, 공공부터 제조업까지

이같은 사회적 요구들은 이른바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한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전통적인 노사협상보다는 정치와 제도의 영역에서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적지 않고,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 민중운동의 힘을 함께 모아나가야 실현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각 산별연맹의 구호나 브랜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띠었던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은 최근 NEIS 반대, 평준화 유지 및 확대, 공교육 정상화 등 매우 구체적인 영역에서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송원재 전교조 대변인은 “전교조 출범당시는 군사독재의 정치적 목적에 교육이 이용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명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이 독점하고 있는 교육기회의 균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한다.

보건의료노조도 처음부터 의료공공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병원내 TV시청 무료, 편의시설확대, 대기시간 단축 등 환자권익 확보운동 등을 중심으로 ‘의료민주화투쟁’이 전개됐고, 90년대에는 의료보험통합 등 낮은 차원의 투쟁들을 거쳐 최근 들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공공병원 확대, 보건의료예산 증액, 의료시장 개방반대 등의 요구로 발전해 왔다.

지하철역 공기오염 문제 제기를 통해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건강권을 주장하면서 출발했던 지하철노조도 외주확대와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에 맞서 ‘청년 일자리 창출’과 ‘시민안전’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제기하게 됐다.

이런 현상은 초기 대부분 정치적 민주화운동에 중점을 뒀던 노동운동이 경제적 민주화 운동으로 무게를 옮겨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다. 나상윤 실장은 “현재는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발달한 반면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경제의 근본구조가 자본권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공공서비스까지 상품화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며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주로 공공부문 노조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의제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편이지만 민간부문의 노조들도 사회적 정체성과 요구를 구체화하고 있다.

금속산업 등 제조업에서는 내수부문의 중소영세 사업장의 쇠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올해 금속노사는 산업공동화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마련을 정부에 제의하기로 합의했다. 정일부 금속노조 정책실장은 “산업공동화 문제는 주류 방송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며 “전체 산업을 살리고 노동운동도 함께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사가 함께 사회개혁의 과제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속 등 제조업에서는 내년에도 비정규직 문제와 산업공동화 등 경제적 쟁점이 중심 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별노조-산별교섭의 발전도 중요한 변수

금융부문의 공공성 강화 문제도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99년 제일은행의 뉴브릿지 매각에서 촉발된 해외투기자본과 자본의 해외유출 문제는 지난해 론스타가 개입한 외환카드 사태로 폭발했다. 이 과정에서 해외투기자본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공광규 금융노조 정책실장은 “과거 공공적 성격이 강했던 은행들이 외국자본에 잠식당하면서 단기수익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다”며 “대안은 금융의 공공성 강화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는 건설현장의 비리척결 운동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건설산업연맹은 신고센터를 개설하는 등 지난해부터 건설현장 비리부패 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명선 연맹 정책부장은 “현장에서의 예방효과나 비리감소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공공건설 분야의 경우 비리 척결은 국민의 세금을 올바로 쓰이게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밖에 올해 여수지역을 중심으로 민주화학섬유연맹이 제기한 유해독성물질에 의한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권 보호 문제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한편 노동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의제들은 산별노조운동의 발전이나 산별교섭의 정착 정도에 비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미 올해 금속노사와 보건의료노사가 합의한 산업공동화 대책 마련,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노사협의기구 구성은 산별노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후 산별교섭에서도 사회적 문제와 산업정책 등이 산별교섭의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운동의 철학 없으면, 싸움꾼에 불과”

산별건설을 앞둔 다른 연맹들도 마찬가지. 공공연맹 나상윤 정책기획실장은 “사회공공성 강화라는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산별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며 “사회공공성 강화가 우리의 내용이 된다면 그것을 담을 그릇은 산별노조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자와 병원,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은 의료제도 개혁을 통해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시키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고 ‘참의료’를 실현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의 말처럼 노동계가 던지고 있는 사회적 의제는 단순한 전술적 요구 차원을 넘어 노동운동의 정체성 찾기이고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으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조합원뿐만 아니라 국민과 사회 전체에도 희망을 주는 일이다. 이 국장은 “노동운동에 철학이 없으면 우리는 싸움꾼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운동이 ‘진짜 멋있는 싸움꾼’이 되기 위해 찾아가고 있는 길을 주목해 볼 일이다.